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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연의 긍정, 의도의 무용함 – 최원서 개인전 《생동》을 마주하며 (2023, 글 윤태균)

 조형 작업은 비평과 마찬가지로 지도 그리기의 과정이다. 작가는 자신이 뿌리 내린 현실을 특수한 지표로 재단한다. 이 지표는 지극히 언어적인데, 인과를 확정할 수 없는 세계에 선을 그어 경계를 두고 구역을 나누기 때문이다. 또한 지도 제작의 방법론은 고대부터 축적된 지도 제작 관습을 따라야 하며 통용되는 행정구역을 지도에 반영한다. 지도는 길잡이가 되어야 하기에 모두가 참조할 수 있어야 하는 기호 체계를 가져야 한다. 그렇기에 지도는 지리의 자연적 재현이자 지리를 정치적으로 구획 지어야 하는 지정학적 행위이다. 물론 앞선 내용에서 말한 ‘지도 그리기’란 예술과 비평의 역할을 지도 제작의 과정과 역할에 대입한 환유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지도와의 환유를 통해 예술이 어떻게 세계를 재현하고 특정한 정치적 태도를 취하는지 명확하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예술은 단순히 세계를 자연적으로 재현하는 일차적 행위가 아니라, 갱신되는 미술사의 언어와 비평적 담론을 사용해 세계를 축척(縮尺)한다. 예술이 현실의 언어적 재매개(再媒介)라면, 이 현실을 이루는 역사, 담론, 언어를 고려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언어적 현실은 예술의 하부 구조가 될 뿐이지 또 다른 재현의 대상이 되지는 않는다. 예술이 가지는 명료한 실천성과 해석의 곤란함은 예술이 이 언어적 현실을 교묘하게 비틀린 특수한 기호 체계로 변환한다는 점에 기인한다. 따라서 예술의 재매개 행위는 예술이 담론의 운반자로, 동시에 담론의 확장자로 존재할 수 있도록 한다. 언어의 차이와 그 사이의 번역 과정은 언제나 오독을 낳고, 이 오독은 창조적 독해의 씨앗을 가지기 때문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최원서의 개인전 《생동》(2023, 소현문, 수원)은 기존의 담론과 미술사를 강력하게 경유하지만 동시에 대안적 방위(方位)를 고안한다. 첫째로, 전시에서 설정한 ‘물질’이라는 범주, 인간 주체의 위치, 생기적 생동의 적용 범위는 기존 담론에서 활발하게 다루어져 왔던 주제이지만 최원서는 이 범주와 개념의 배치를 다시 고려한다. 둘째로, 과거 작업에서 《생동》까지 이어지는 조형의 미술사적 경유지는 명확하다. 그러나 작가는 이 역사적 현상을 또다른 담론의 태도로 갱신한다.

 과거부터 지속된 최원서의 작업에서, 그 표면적 형식은 달라졌지만 작업이 견지하는 태도는 연속적이다. 최원서의 디자이너/작가라는 이중적 주체성은 작업 과정에서의 형식적 고민을 가중하지만 그는 이 고민을 분열증으로 이끌기 보다는 기존 작업들을 관통하는 연속적 태도로 하나의 자아에 붙잡아 둔다. 이 태도는 작가의 일관된 형식적 기조에서 유추할 수 있다. 형식이 태도가 되는 것이다. 최원서가 2021년 전시 《재배치》(2021, 데스커디자인스토어, 서울)에서 발표한 일련의 가구-조각은 그가 사물을 대하는 태도를 단적으로 보인다. 날 것의 산업 재료를 접합하고 묶어 다시 배치하는데, 이 때 작가는 산업 재료들의 집합에서 의도치 않은 예술적 가능성을 탐색한다. 규정된 예술 바깥의 것을 예술의 영역으로 포섭하거나 예술을 예술 밖의 영역으로 끌어내리는 실천은 새로운 것이 아니지만, 최원서가 염두에 두는 것은 의미 이전 사물이 가지는 잠재성의 영역을 확장하는 실천이다. 이 태도는 《추론-가물》(2023, 남산골 한옥마을, 서울)에서도 유지된다. 이전 전시에서 사물 자체의 잠재태에 집중했다면, 작가는 《추론-가물》에서는 현대의 산업 재료와 전통적 건축 양식의 형태적 유사성에서 일종의 사변적 서사를 구축한다. 알루미늄 프로파일 묶음의 단면의 무늬와 한옥의 창살 무늬의 형태적 유사성은 전통이라는 역사적 축적을 마주할 수 있는, 그리고 산업 재료라는 기능적 축적을 마주할 수 있는 상이한 환경을 해체하고 한 환경으로 섞어 버린다. 그러나 이는 전통과 산업 양자의 혼란스런 해체에 그치지 않고 서로의 미적 경험을 정교하게 혼합하는 상호 번역 과정으로 남는다. 이처럼 최원서는 의미의 자기완결성을 배제한다. 오히려 작품 외부의 이질적 요소들을 작품 영역 내부로 끌어들여 언어의 확장을 발견하고자 한다. 결국 예술과 예술 바깥, 재료와 작품, 작품과 작품 외부, 유용함과 무용함의 경계는 흐려진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작가는 언어로 강력하게 규정지어진 현실을 재현하기 보다는 이 현실의 언어를 비틀고 다시 규정짓는 것이다. 이 또한, 경계를 무화하려는 노력은 작가 본인이 가지는 디자이너/작가라는 이중적 주체성의 분열을 방지하려는 노력이기도 하다.

 

 개인전 《생동》에서, 최원서는 경계의 취약성을 주체와 물질이라는 두 영역에 대입한다. 최근 세계와 물질의 속성을 다시 사유하고자 하는 다수의 이론은 위의 영역을 사유하고자 하는 작가에게 참조가 된다. (각 이론의 상이함에도 불구하고 같은 이름의 범주로 언급되는) 신유물론, 객체지향존재론(Object-oriented ontology) 등의 이론은 최원서가 작업의 언어적 구조를 설정할 수 있는 적당한 개념적 영역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주체와 물질. 강력하게 농축된 역사적, 철학적 논의에 따라 구축된 두 영역은 결국 정치적이다. 기존 철학의 정합성을 떠나 전통 철학이 향한 역사는 인간중심주의적이기 때문이다. 최원서는 신유물론과 객체지향존재론이 제공하는 개념에서 시작해 기존의 담론을 예술적 방법으로 전유한다. 정합성이 요구되는 철학, 엄밀함이 요구되는 과학과는 달리 예술에는 사변과 허구가 허용된다. 최원서가 기존 담론의 윤리적 실천에 동조하면서 그 철학적 방법론을 비틀기 위해 채택한 예술적 방법은 생기적 육신의 확장이다. 1층에 위치한 <증식>(2023)은 재료로 사용되었던 구리가 세포와 같이 증식되고 생물학적 구조를 이룸을 가정한다. 이러한 사변은 구리가 혈액의 헤모글로빈을 합성하는 역할을 한다는 점에서 전유된다. 그리고 증식되어 구조를 이루는 구리세포-증식체는 감상자와 동등한 위치에 서고, 벽을 통해 번진다는 점에서 인간의 언어적 사유에 균열을 낸다. 따라서 <증식>은 구리의 실재적 수행성을 증명하여 그 지위를 끌어 올리는 데에 주안을 두지 않는다. 상호 이질적인 서사, 즉 산업과 인간 역사에 의해 통제되었던 구리의 서사와 구리가 증식하고 생기적 구조를 이룬다는 사변적 서사를 병치하여 그 차이를 통해 물질의 언어적 잠재성을 확장하고 기존의 언어가 통용되는 정치적 조건을 밝혀내는 것이다. <증식>이 물질의 속성이 규정되는 언어적 조건을 다루었다면, 2층의 작업 <붉으락 푸르락>(2023)은 인간의 생기적 육체와 적동(赤銅)의 형태적 유사성을 통해 또 다른 사변을 꾀한다. 이전에 《추론-가물》 등의 전시에서 최원서가 자주 고려해왔듯, 두 이질적 사물에서 발견되는 형태의 유사함은 두 사물을 함께 사유할 때 유용하다. 적동을 성형하는 과정의 ‘열풀림 현상’은 적동 표면에 얼룩덜룩한 무늬를 만든다. 최원서는 이 무늬에서 인간 육신 피부의 ‘멍’을 상상한다. 이 살아있는 듯한 적동은 얼굴도 가지고 있다. 적동 구조물이 생기적 육신을 가지고 앞에 선 상황에서 우리는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할까? 물론 구리와 적동은 유기체와 같이 생기적 수행성을 가지지는 않는다. 스스로가 언어로 발화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지도 않는다. 하지만 작가는 적동을 과학적으로 재사유하기 보다는 잠시 예술의 영역에 멈춰 세워 사변적 인격체로 소개한다. 모든 (일부 이론가들에 의해 객체라고 불리기도 하는) 물질이 (생기적으로) 동등하다는 주장은 물질 간의 내부 관계와 위계, 무수한 관계 맺음을 단순화하는 언어적 재단이다. 그 기이함에 집중해야 한다. 일상적 언어 체계에서 벗어남으로써 나타나는 이 기이함이 새로이 사유할 수 있는 찰나를 마련해 주기 때문이다. <증식>에서 언어의 조건에 관해, <붉으락 푸르락>에서 주체와 물질의 언어적 관계에 관해 다루었다면 <사물놀이>(2023)에서는 보다 구체적인 관계의 조건을 제시한다. 열화상 카메라는 열에너지의 상태와 이동을 시각적으로 보여준다. 작가는 일상적인 사물을 만지고 자신의 열을 사물에 전달한다. 열의 전달을 광학 기기로 보여주는 것은, 행위 주체와 사물의 관계가 언어적 표현으로 그치지 않고 실재적으로, 물리적으로도 얽혀 있음을 고지하는 것이기도 하다.

때로 주체와 세계의 관계에 대해 다루는 사유는 상관주의적 태도에 봉착하기도 한다. 상관주의란 물질을 사유할 때 생산되는 ‘현실’과 ‘주체와 객체’와 같은 속성들이 물질과 사유 사이의 상호 관계성에 의해 생성된다는 관점이다. 우리가 물질에 관해 엄밀하게 사유하려고 하는 노력들 또한 인간의 상관적 언어를 통과해야만 가능하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상관주의는 물질이 인간과의 마주침 이전에 존재한다는, ‘물러난 객체’를 상정한다. 언어 이전의 실재와 언어로 인식되는 세계를 분리하여 인간의 사유가 물질 그 자체에 도달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 한계 이후로 나아가야 한다. 나아가기 위한 방법의 일환으로, 세계가 인간의 언어 이전에 존재하는 고유한 물질로 생각하기 보다는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가 관측 이후에 비로소 존재하는 양자적 물질임을 인정해야 한다. 그리하여 우리, 그리고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가 다종다양한 물질들과 그로 인해 형성되는 우리 주체의 복합적이고 규명 불가능한 관계 속에서 작동하고 있음을 깨달을 수 있다. 최원서 개인전 《생동》은 물질에 관한 정합적이고 실재적 규명을 추동하기 보다는 인간, 주체와 사물의 관계 자체를 사변적으로 재구축하여 대안적 인식의 시공간을 마련한다. 여러 관계들이 뒤얽힌 세계를 절단하여 그 절단면을 예술의 이미지-언어로 치환하는 것이다. 우리는 인간을 포함한 수많은 물질이 독립적 존재와 의미를 가진다고 오해하기 보다는 물질이 서로와 관계 맺어 비로소 해당 물질로 존재할 수 있다고 말해야 한다. 구리, 적동의 앞에 섰을 때에 사로잡혔던 그 기이함은 사유로 규명해야 하는 상황이 아니라 사유의 종착점이다. 예상하지 못했던 우연을 긍정하고 의도의 무용함을 인정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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