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옴니버스 이야기_ Artist Statement (2024, 글 최원서)

[머리말]

알루미늄 파이프, 적동, 나무와 한지, 폐플라스틱과 3D프린팅. 나의 작업을 이루는 주요한 재료, 물질들이다. 글의 머리말을 재료에 내어주며 스스로의 부족함을 고백한다. 너 없이는 내가 무엇을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모르겠다. 난 딱히 하고 싶은 이야기가 없다. 다만 너를 만나 일어난 사건들이 이야기가 될 수 있다면 어떤 말을 해야할지 조금은 알 것도 같다. 하여 재료와 물질, 너에게 그 몫을 내어준다.

 

[이야기 1]

은은한 은빛으로 곧게 뻗은 몸체를 썰어 내보인 단면에서 너를 보았다. 남들에게 잘 드러내 보이지 않는 너의 모습은 화려한 문양이었다. 너가 단지 설계된 도면이라는 사실을 어렴풋이 알지만, 나는 모른척 하기로 했다. 사람들은 너의 아름다움을 가린 채 일만 시킨다. 너의 처지가 나와 다르지 않아 묘한 동질감이 든다. 너를 내옆에 두고 싶었다. 나는 너의 아름다운 문양이 빼곡하게 드러난 가구를 만들어 방 한켠에 두었다.

 

어느날 너를 사람들에게 보여준 날이 있다. 너를 본 사람들의 반응은 “동양적이다”는 말. 심지어 어떤이는 “전통이 현대적으로 재해석 되었다”는 당혹스런 평을 내놓기도 했다. 사람들은 저마다 갖고 있는 문화적 배경에 따라 자신의 전통을 너에게 투영해대기 시작했다. 동양의 단청문양 부터 서양의 아르누보, 아라베스크 등. 참으로 당황스러운 반응들이다. 한편, 너가 자유롭게 뭐든 될 수 있는 묘한 상황에 나는 일종의 해방감을 느낀다. 

 

우리는 이 상황을 일종의 놀이 삼아 즐기기로 했다. 더욱 적극적으로 전통적인 척을 해댔다. 한옥의 일부인 것 처럼 변신하여 구석과 모퉁이에 슬쩍 숨었다. 나무와 한지로 옷을 갈아입어 실제 한옥의 일부가 되기도 했다. 사람들이 널 찾을 수 있을지 궁금했다.

 

[이야기2]

구릿빛 피부의 차가운 너를 보았다. 너는 그릇이 될 운명이란다. 차가운 너의 몸을 뜨겁게 가열한다. 빨갛게 물러진 너의 몸을 망치로 때린다. 볼록해진다. 너를 너와 연결하기 위해 열을 가해 용접 한다. 그렇게 기어코 반듯한 그릇 하나를 만들었다. 허나 그릇은 나의 관심 밖이다. 내 머릿속에는 너가 보여준 무지개 빛 만이 아련하다. 내가 네게 열을 가할 때 너는 무지개빛 비명을 질렀다. 구리빛 피부속에 숨겨둔 너의 찬란한 모습이 새삼 생경하다.

 

농구를 하다 왼쪽 발목을 자주 접질리곤 한다. 볼록 튀어나온 복사뼈 근처가 벌겋게 부었다가 퍼렇게 멍이든다. 노랗게 퍼지더니 이윽고 다시 피부색을 되찾는다. 문득 너의 표면은 나의 피부와 닮았다. 갑자기 아려오는 왼쪽 발목의 통증은 또 무엇인가.

 

[이야기3]

켜켜이 쌓여가는 너의 모습을 사람들은 견딜 수 없다. 너를 벅벅 갉아 내거나, 다른 물질로 덮어 매끈하게 만든다. 한때 너는 세상을 바꿀 혁신의 아이콘이었는데. 지금은 환경파괴의 주범 혹은 그저 골칫거리 취급을 받는다. 구식이 되어 새로운 것에 의해 외면 받는다. 가끔 너를 보면 애잔해진다. 그래서 나는 너를 드러낸다. 퇴적(출력)된 너의 단면을 드러내어 지금껏 너의 행적을 기리는 기념비를 세워야 한다. 과거를 인정하고 현재를 성찰하며 미래를 경계할 기념비를 세워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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